
사진. 로봇기술
산업용 로봇 시장이 ‘협업 응용(Collaborative Application)’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이제 로봇 산업의 경쟁력은 단순한 기계적 정밀도나 속도가 아니라, 국제표준에 부합하는 안전성 검증과 데이터 기반의 신뢰성 확보로 평가받는 시대가 도래했다.
지난 서울 명동 르메르디앙호텔에서 열린 ‘산업용 로봇의 글로벌 동향과 국제표준전략 세미나’는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집약적으로 보여준 자리였다.
국가기술표준원이 주최하고 한국AI·로봇산업협회가 주관한 이번 행사에는 프라운호퍼 연구소, 경희대학교, 한국산업기술시험원(KTL), 세이프틱스 등 국내외 주요 기관과 기업이 참여해, ISO 10218 및 ISO 15066 개정안의 주요 내용을 비롯해 실제 인증 및 적용 사례를 폭넓게 공유했다.
표준은 규제가 아니라 시장의 언어
첫 발표를 맡은 프라운호퍼 연구소 관계자는 표준은 기업의 진입장벽이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 참여하기 위한 언어라고 강조하며, 협동로봇 안전 표준의 근본적 전환을 설명했다.
국제표준화기구(ISO)의 TC 299 WG 3에서 협동로봇과 관련해 최초 개발됐던 ISO/TS 15066을 TC 299 WG8(Biomechanical Data and Validation Methods for Physical Human-Robot Interactions)에서는 정식 국제표준으로 발전시키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인체의 생체역학 한계 데이터를 다루는 ISO 15066-1, 시험 방법을 규정한 15066-2, 충돌 시뮬레이션을 다루는 15066-3 프로젝트로 발전시킬 예정이다.
새 표준들은 인간-로봇 협업 시 허용이 가능한 힘·압력·에너지 값을 명확히 규정해 글로벌 안전 기준을 통일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중 15066-3은 산업계가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이 표준은 기존의 사후 시험 중심 안전검증 방식에서 벗어나, 설계 단계에서 시뮬레이션을 통한 위험분석을 의무화한다. 이는 생산 라인 구축 후 안전 문제가 발생해 설계를 수정해야 하는 비효율을 방지하고, 제품 개발 초기부터 정량적 데이터를 확보해 인증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는 “협동로봇의 안전은 단순히 충돌을 막는 차원을 넘어, 인체 부위별 접촉 허용 한계와 통증 발생 임계값까지 고려하는 정밀한 안전 공학으로 발전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실제 프라운호퍼 연구소는 독일, 한국 등에서 수집된 생체 반응 데이터를 활용해 부위별 충돌 허용 값을 새롭게 정의하고 있으며, 이러한 데이터는 ISO 15066-1 개정안에 반영될 예정이다.
그는 또한 “ISO/TS 15066의 업그레이드는 단순한 물리적 안전 기준을 넘어, 작업자와 로봇 간의 동적 상호작용을 리스크 기반으로 제어하는 체계를 요구하는 유럽 Machinery Regulation 개정안의 방향성과 부합한다”라며 “이처럼 작업자 접근 시 속도를 낮추고, 이격 시 속도를 높이는 가변속 제어 체계가 국제 표준의 새로운 기준으로 정립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협업 응용 중심의 ISO 10218 개정
두 번째 발표자로 나선 경희대학교 임성수 교수는 최근 발표에서 “이제 중요한 것은 로봇이라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로봇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고 프로그래밍하는 것에 따라 안전 요구가 달라지는 협업 응용 개념”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로봇 산업이 단순 자동화에서 벗어나, 실제 현장에서의 활용성과 조합 능력이 경쟁력을 좌우하는 단계로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임 교수는 14년 만에 개정된 ISO 10218:2025가 산업에 미칠 영향을 집중적으로 설명했다. 새로운 표준은 로봇의 기계적 안전 요구를 규정하던 기존 체계를 넘어, 로봇 시스템을 구성하는 하드웨어·소프트웨어·안전 파라미터 설정·작업자의 운용 방식까지 포함한 총체적 안전 체계로 확장됐다. 특히 로봇의 속도·질량·운동 특성을 반영한 클래스(Class) 1·2 분류가 새롭게 도입돼, 각 클래스에 따라 필요한 기능안전 요구 수준(PL/SIL)이 달라진다. 이는 로봇의 실제 위험도를 기준으로 안전을 설계하도록 촉구하는 변화다.
AI 적용에 대한 논의도 이어졌다. 임 교수는 “AI는 확률적 특성 때문에 아직 안전 기능을 직접 대체할 수 없다”라고 지적하며, AI 분석 결과를 먼저 활용하되, 최종 안전 정지는 결정론적 안전 필터가 담당하는 구조가 당분간 유지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로봇 충돌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접근 방식 역시 변화하고 있다. 기존에는 실제 장비를 이용한 충돌 시험이 복잡하고 불완전했지만, 최근에는 시뮬레이션 기반 충돌 모델링 기술이 정밀도를 확보하며 산업 현장에서 활용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번 발표는 산업계가 준비해야 할 방향을 명확히 보여준다. 로봇은 더 이상 ‘기계’가 아니라, 표준·데이터·AI·기능안전이 결합된 하나의 시스템이며, 산업 현장은 이제 로봇의 성능보다 활용 방식과 애플리케이션 안전성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인증은 기술의 증거이자 시장의 신뢰
세 번째 발표자인 한국산업기술시험원 이동혁 센터장은 산업용 로봇의 인증·시험 현실을 구체적으로 짚었다.
그는 “로봇 시험·인증은 안전, 성능 신뢰, 시장 진입, 산업 신뢰, 표준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획득을 해야 한다. 따라서 국제 규격에 따른 시험(Test), 검교정(Calibration), 인증(Certification)의 3단계 적합성 평가 체계를 충족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현재 글로벌 시장에서 기능안전 부품으로 분류되는 센서, Safety PLC, 엔코더, 토크센서 등은 PLd~e, SIL2~3 수준의 인증을 요구받고 있다.
특히 Class 2 수준 이상의 로봇을 개발하는 경우, 설계 단계에서 진단 커버리지(DC)·평균고장간격(MTTFd)·확률적 고장률(PFH)을 동시에 고려한 구조 설계가 필수다.
이 센터장은 “표준이 완비되지 않은 영역에서는 산업 수용수준의 시험성적서라도 확보해 신뢰를쌓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국내 기업은 여전히 성능 중심의 자료는 많지만, 성장하기 위해서는 교정 추적성(Traceability)이 확보된 데이터와 기술 파일이 필요한 시점이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해외 고객사는 화려한 영상보다 데이터 기반의 검증 문서와 위험성 평가 보고서를 신뢰한다”라며 “기능안전과 품질 문서화가 글로벌 공급망 진입의 관문”이라고 말했다.
협업 셀 안전 설계와 효율성 확보 방안 제시
마지막 발표자로 나선 세이프틱스 신헌섭 대표는 협업 셀의 안전 설계와 효율성 확보 방안을 실제 사례 중심으로 제시했다.
협동로봇이 제조 현장에서 널리 활용되면서, 사람과 로봇이 같은 공간을 공유할 때의 실질적 안전 확보가 핵심 과제가 되고 있다. 세이프틱스 신헌섭 대표는 “과거 산업용 로봇은 펜스로 완전히 분리하는 방식이 기본이었지만, 협동로봇은 사람과 충돌 자체를 피할 수 없는 구조”라며 충돌 시 발생하는 힘·압력이 허용 범위 이하라면 작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PFL(Power & Force Limiting) 기반 접근이 중요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헌섭 대표는 협동로봇 셀 안전 방식으로 ▲펜스 ▲라이트커튼·레이저 스캐너 등 감시 센서 ▲속도·거리 기반 안전제어 ▲힘·압력 검증(PFL) 네 가지를 제시했다. 그러나 센서 사각지대, 안전거리 증가, 작업자 동선 제약 등으로 인해 단일 방식만으로는 안전과 생산성을 동시에 만족시키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특히 “협동로봇의 내장 PFL 기능만으로는 측정되는 사례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직접 충돌시험과 FEA 기반 해석의 한계도 언급됐다. 충돌 포인트가 많고 로봇 경로가 복잡해 모든 구간을 실험·해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에 대해 신헌섭 대표는 로봇 모션, 엔드이펙터 정보, 신체 모델을 기반으로 모션 구간별 허용 속도를 산출하는 자체 시뮬레이션 기반 PFL 검증 기술을 소개했다. 이를 통해 “어떤 구간은 감속하고, 다른 구간은 오히려 속도를 높일 수 있어 생산성과 안전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안전은 설치 후 보완이 아니라 설계 단계에서 결정된다”라며 세이프틱스의 ‘세이프디자이너’ 소프트웨어와 로봇 속도를 실시간 조정하는 PFL 스피드 컨트롤러를 통해 설계 초기부터 충돌 안전·센서 배치·속도 전략을 통합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표준 내재화와 데이터 기반 인증 체계 확보 시급
세미나 참석자들은 공통적으로 “표준 대응은 사후 절차가 아니라 개발 초기의 스펙 설계 과정에 포함돼야 한다”라고 입을 모았다.
특히 ISO 10218과 ISO 15066 개정이 발효되면, 로봇 제조사뿐만 아니라 부품, 센서, 제어기, 모듈 공급업체까지도 목표 PL/SIL 등급 기반 설계 체계를 구축해야 하며, 각 단계별 검증 데이터를 문서로 축적하는 체계가 요구된다.
국내 기업들도 이러한 변화를 인식하고 있다. 주요 제조사는 이미 ISO 10218·15066 기반 협동로봇 인증 체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일부는 자체 안전 데이터베이스를 운영해 제품별 안전 검증 절차를 자동화하고 있다.
또한 국내 시험기관들도 로봇 부품 및 시스템의 기능안전 시험 설비를 확충하며, 국제공인시험소(ILAC) 연계를 강화하고 있다.
